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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한끼금식 _제8일(부활절) 부활의 주를 만난 삶
“···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 ” (누가복음 24: 25-35)
금요일에 장사지낸 바 된 예수님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본문은 예수 부활사건이 전해진 그날 오후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셨고, 실의에 찬 그들이 부활의 주를 만나 용기를 얻었다는 기록입니다.
글로바와 다른 한 제자는 그날 아침 예수의 부활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하고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주께서 그들 사이에 동행하시면서 구약성서를 풀어 주셨습니다. 메시야가 고난받으셔야 할 것과, 그 고난 후 영광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 후 그들의 목적지까지 도달하여 떡을 떼실 때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고, 용기를 얻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부활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과 동행하셨는데 왜 그들은 깨닫지 못했을까요?
마가복음 12장 12절에는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셨다”고 했습니다.
또한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이라고 누가는 기록해 줍니다.(16절).
그런 그들이 말씀을 풀어 주실 때 마음이 뜨거워졌고, 떡을 가지사 축사하사 저희에게 떼어 주실 때 “저희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묵상
1. 예수의 부활의 사실을 의심할 때가 있나요?
2. 부활을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3. 부활 신앙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생동감 있게 하나요?
말씀과 한끼금식 _제8일(부활절) 부활의 주를 만난 삶
하루묵상
923
2026/04/05
말씀과 한끼금식 _제7일(토요일) 무덤 속의 예수
“··· 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를 내려다가 그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 (마가복음 15:42-47)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청하여 자기를 위하여 새로 만들어 둔 무덤에 장사지냈습니다. 그는 알려지지 않은 제자였지만 이제는 관헌의 박해와 친지들의 차가운 눈총을 무릅쓰고 용기있게 행동했습니다. 그는 당당히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 인도를 요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자신이 무덤에 들어가심으로 죽음을 이기시고 악의 권세를 물리치시게 되셨습니다. 그는 무덤의 어두움을 제거하셨으며 그 공포를 영원히 쫓아 버리셨습니다. 죽음이 그 쏘는 살로 그리스도를 상하게 했지만 부활하심으로 이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그 위력을 끼치지 못하게 만드셨습니다.
묵상
1. 예수의 즉으심과 부활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2. 기독교인은 죽음을 어떻게 맞아야 할까요?
3. 예수를 무덤에 장사지낸 이들의 슬픔이 부활을 목격한 후에는 어떻게 변화되었나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말씀과 한끼금식 _제7일(토요일) 무덤 속의 예수
하루묵상
922
2026/04/04
말씀과 한끼금식 _제6일(금요일) 십자가에 달리시고 운명하시다
“···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 (마가복음 15:16-41)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을 명상함으로 하나님의 섭리와 위대하신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1.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은 한이 없습니다.
2.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회개하는 죄인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희망을 주십니다.
3. “어머니 보소서. 아들입니다.” 인간 사이에 있어야 할 돌봄과 사랑을 보여 주십니다.
4.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대신 지신 죄 때문에 고통 당하시고 버림받으시는 예수님의 거룩한 절규를 보게 됩니다.
5. “내가 목마르다.” 인간들의 사랑과 헌신과 충성을 요청하시는 갈증입니다.
6. “다 이루었다.” 거룩한 희생으로 모든 죄를 속하셨다는 하나님 어린 양의 승리의 외침입니다.
7. “아버지 내 영혼을 당신의 손에 맡깁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셨습니다.
묵상
1. 용서함 받은 우리는 역시 남을 용서하며 사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2. 훗날 우리가 남길 유언을 생각해 봅시다.
말씀과 한끼금식 _제6일(금요일) 십자가에 달리시고 운명하시다
하루묵상
921
2026/04/03
말씀과 한끼금식 _제5일(목요일) 최후의 만찬
“····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 (마가복음 14:22-25)
예수님께서는 그가 배반당하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셨습니다.
이 때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드셨습니다. 이는 십자가 위에서 자기 몸을 희생해 제자들의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되실 것을 말씀으로만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있는 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찢기실 자신의 몸과 흘리신 피로 속죄를 이루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마지막 만찬 때 예수님은 한 사람의 제사장으로서 그의 영원한 영혼을 흠없이 하나님께 드리셨던 것입니다.
묵상
1. 최후의 만찬에 참여한 제자들의 심정을 생각해 봅시다.
2.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먹음으로 속죄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들은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를 생각해 봅시다.
말씀과 한끼금식 _제5일(목요일) 최후의 만찬
하루묵상
920
2026/04/02
말씀과 한끼금식 _제4일(수요일) 한 여인의 헌신
“ ···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마가복음 14:3-9)
예수께서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한 여인이 비싼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예수께 나아 와 그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 향유는 300데나리온에 팔 수 있다고 하는데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보통 하루 품삯에 해당합니다. 이 향유는 무척 비싼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여인에게서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사랑의 충동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불평과 비난 속에서도 예수를 향한 그녀의 사랑은 그칠 줄 몰랐습니다.
이 일을 주님께서 칭찬하셨습니다.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묵상
1.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며, 주님을 위하는 데 따라야 할 자기 희생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2.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함과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에서 ‘봉사의 기회’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기회를 놓치지 말고 봉사해야 할 일에 어떤 것이 있을까요?
말씀과 한끼금식 _제4일(수요일) 한 여인의 헌신
하루묵상
919
2026/04/01
말씀과 한끼금식 _제3일(화요일) 과부의 두 렙돈 교훈
“...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 ” (마가복음 12:41-44)
예수께서 헌금대를 대하여 앉으셔서 그들의 헌금 넣는 것을 지켜보셨습니다.
“42 한 과부는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이때 예수님께서는 “43 ...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평범한 것 같은 이야기에서 실로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강조되어 있는 점에 주의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양보다는 질을 중요시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기뻐 받아 주실 만한 것입니다.?
묵상
1.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헌금은 어떤 것일까요? (고후 19:7;8:12)
2. 다음의 말씀을 생각해 봅시다. “많은 사람들은 지갑으로만 바쳤지만 그녀는 마음으로부터 바쳤습니다. 이는 습관을 좇아 드리는 것과 사랑으로 드리는 것의 차이입니다.”
말씀과 한끼금식 _제3일(화요일) 과부의 두 렙돈 교훈
하루묵상
918
2026/03/31
말씀과 한끼금식 _제2일(월요일) 성전을 청결케 하심
“15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 (마가복음 11:15-19)
당시 성전 안에서는 명절 때 희생의 제물로 쓸 짐승과 향유, 그밖에 필요한 물품을 매매하였고, 성전 안에서만 쓰는 유대 화폐를 교환하여 주곤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인들, 돈 바꾸는 자들과 결탁한 제사장들은 막대한 부당 이익을 취하였습니다. 그래서 성전은 완전히 시장과 같이되어 버렸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들을 내어쫓으시며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막11:17)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참 제사장의 자격으로 더러워진 성전에 대해 격분하시고 이를 깨끗케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성전뿐 아니라 온 세계를 성결케 하시려는 하나의 표징이 됩니다.
묵상
1. 오늘의 교회는 혹시 이기주의, 상업주의 정신에 젖어 있지 않나요?
2. 하나님의 성전을 참으로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기 위해 나는 어떤 신앙의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말씀과 한끼금식 _제2일(월요일) 성전을 청결케 하심
하루묵상
915
2026/03/30
말씀과 한끼금식 _제1일(주일) 예루살렘 입성
“....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 (마가복음 11:1-11)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의 성으로 공공연히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셨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지켜 보았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진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둘러보셨습니다. 그리고 웅장하고 아름답게 장식된 성전 속에서 인간의 위선, 탐욕, 가증스러움, 이기주의 등의 죄악이 가득 차 있음을 보셨습니다.
다음 날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더럽혀진 성전을 깨끗케 하기 위해 채찍을 드셔야 했습니다.
묵상
1. 고난과 죽음을 미리 아시면서도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의 용기를 생각해 봅니다.
2. 오늘 내 마음 속을, 우리 교회를 예수님께서 오셔서 둘러보신다면 무엇을 느끼실까요? 우리 자신과 교회를 살피며 주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한 기도의 시간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말씀과 한끼금식 _제1일(주일) 예루살렘 입성
하루묵상
914
2026/03/29
Topic. 말라기 4장 2절, "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에서 '치료하는 광선'은 어떤 광선일까요? 질병을 치료하는 광선일까요?
먼저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말라기의 배경과 어떤 맥락 속에서 사용되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말리기서는 학개, 스가랴와 함께 포로귀환기에 쓰여진 성경입니다.포로로 끌려왔다가 다시 돌아와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는 상황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범죄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에 대한 지적과 책망이며, 그 책망들과 함께 이후에 일어날 어떤 일에 대한 말씀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이러한 소선지서는 비슷한 패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전반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악함에 대해, 후반부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회복케 하심을 기록합니다. 따라서 말라기 4장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말씀입니다. 즉 "악을 행하는 자는 지푸라기 같이 불살라질 것"(말3:1)이지만,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게 될 것"(말4:2)이라는 하나님의 선포입니다.
그렇다면 치료하는 광선은 대체 뭘까? 무엇을 지칭하는 말일까?
먼저 아셔야 하는 게, 히브리어 원어에는 "광선"이라는 표현이 나오지 않고, "날개" 라는 단어(히브리어 _카나프)가 사용되었습니다. 보통 우리가 이 구절을 읽을 때 마치 하늘에서 어떤 치료의 빛이 쏟아져서 레이져 치료를 하듯이 자신에게 쏘이는 것을 상상하지만, 날개로 덮으시는 하나님의 보호를 나타내는 의미입니다.
또한 "2 ...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에서 "공의로운 해"는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표현입니다.
게다가 말라기 3:1에서 '사자'는 각각 누구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치료하는 광선'(말4:2)은 어떤 광선일까요?
하루묵상
899
2026/02/27
Topic. '루시퍼'는 누구의 이름일까요?
오늘날 많은 사람드이 사탄의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루시퍼...' 그런데 이런 생각해 보신 적 없으십니까? '성경에 사탄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데, 어떻게 사람들이 사탄의 이름을 알고 있을까? 그 이름의 출처가 어딜까?' 성경에 루시퍼라는 말이 나오나요? 루시퍼라는 말은 어디에서 나온 거일까요? 루시퍼는 진짜 사탄의 이름이 맞을까요?
루시퍼라는 말은 한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영어, 히브리어, 헬라어 성경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루시퍼'라는 말은 라틴어 성경에 있는 '루키페르'를 영어식으로 읽은 것입니다.
'루시퍼'라는 말은 라틴어 성경 이사야 14장 12절에 등장합니다. "12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루시퍼'는 어원적으로 '빛'이라는 의미의 'lux'와 '가져오다'는 뜻의 'ferre'가 합쳐져서 생긴 말로써, 문자적으로는 '빛을 가져오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의 뜻은 '금성'입니다. 즉 '루시퍼'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사탄의 이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로 그대로 옮기면 그냥 '금성, 샛별'이며, 혹은 의미를 첨가하여 '계명성, 새벽별'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평범한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평범한 단어 '루시퍼'가 사탄의 이름을 의미하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인식되게 된 것은 절대적으로 이사야서 말씀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서 기인합니다.
이사야 14장에서 '루시퍼'가 등장하는 전후 구절을 함께 살펴보면 대략 이런 내용들입니다. "11 네 영화가 스올에 떨어졌음이여 네 비파 소리까지로다 구더기가 네 아래에 깔림이여 지렁이가 너를 덮었도다 12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1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그리고 이사야 14장의 구절이 사탄에 대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유다서 내용과의 유사성을 근거로 하여 두 구절이 같은 사건을 나타내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유다서 6절).
'루시퍼'는 누구의 이름일까요?
하루묵상
851
2025/09/26
Topic. 아브라함은 가장 소중한 것을 바쳤을까?
창세기 22장의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사건을 통해, 이런 설교를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여러분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릴 수 있도록 하십시오. 아브라함에게 있어 늦게 얻은 이 독자보다 더 귀한 것이 있었겠습니까? 여러분도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하십시오.'
하나님께 가장 귀한 것을 드린다는 주제는 결코 성경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성도라면 누구나 하나님께 가장 귀한 것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닙니다. 과연 이삭을 바치는 그 이야기가 그러한 사실을 가르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본문은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치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아브라함은 이삭을 하나님께 바칠 생각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잃을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고 했을 때에 그는 하나님께 가장 사랑하는 것을 드린다는 생각으로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왜 이 사건이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과 관계없는 것일까요?
창세기 22:5 "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여기서 우리는 복수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을 칭합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고 오려고 했다면, '우리'라는 복수형을 사용하지 않았어야 합니다.
이런 설명에 대해서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에이~ 그거야 그냥 이삭이나 종들이 듣고 있으니깐 그렇게 말한 것 아닙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 뿐만 아니라 히브리서에도 명시적으로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17~18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하셨으니".
이삭은 약속을 성취하기 위하여 태어난 아이입니다. 따라서 이삭은 죽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통해 약속을 성취하시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에 이삭은 살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 하셨고, 아브라함을 그 이삭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사건은 '이삭을 통하여 자손이 번성할 것이다'라는 약속과, '지금 네 아들 이삭을 죽여 제물로 바쳐라'라는 두 가지 계시가 충돌을 일으킨 상황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고민은 '이 아들 이삭을 어떻게 바쳐야 하는가' 라는 종류의 고민이 아니라, "왜 하나님은 서로 상충되는 두 종류의 말씀을 주시는고!"에 관한 것입니다. 신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언약과 명령의 충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믿었던 놀라운 바가 나타납니다. 히브리서 11: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가장 소중한 것을 바쳤을까?
하루묵상
850
2025/09/25
Toipc.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의 의미와 우상 숭배
A God이냐, The God이냐의 차이는 어떤 것일까요?
출애굽기 32장에서 이스라엘읕 금송아지를 만듭니다. 그런데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그러니깐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든 것은 하나님을 배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열렬하게 예배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향해 하나님은 어떤 평가를 내리십니까?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조금' 잘못 안 것뿐인 이스라엘에게 대노하십니다. 게다가 지금까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이라고 하셨는데, "네(=모세)" 백성이라며 '자기 백성'이라 부르시지 않으셨습니다.
사사기 17장에는 미가가 우상을 만든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에서 미가는 집 안에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은장색을 통해 신상을 만들어 집에다 둡니다. 미가는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부패한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덧대어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런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는 사실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상정한, 어떤 신으로서의' 하나님이어도 괜찮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은 '항상 성경에 기록된 대로의 여호와'셔야 합니까? 당연히 답은 후자입니다. 성경은 전자와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우상 숭배'라고 합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의 의미와 우상 숭배
하루묵상
847
2025/09/19
Toipc.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의 의미와 우상 숭배
A God이냐, The God이냐의 차이는 어떤 것일까요?
출애굽기 32장에서 이스라엘읕 금송아지를 만듭니다. 그런데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그러니깐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든 것은 하나님을 배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열렬하게 예배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향해 하나님은 어떤 평가를 내리십니까?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조금' 잘못 안 것뿐인 이스라엘에게 대노하십니다. 게다가 지금까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이라고 하셨는데, "네(=모세)" 백성이라며 '자기 백성'이라 부르시지 않으셨습니다.
사사기 17장에는 미가가 우상을 만든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에서 미가는 집 안에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은장색을 통해 신상을 만들어 집에다 둡니다. 미가는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부패한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덧대어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런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는 사실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상정한, 어떤 신으로서의' 하나님이어도 괜찮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은 '항상 성경에 기록된 대로의 여호와'셔야 합니까? 당연히 답은 후자입니다. 성경은 전자와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우상 숭배'라고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에는 대단히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모르는 것은 대충 다 덮고, 열정만 남발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가 열심이 있는지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상세히 알려고 하는 사람은 지식만 추구하는 메마른 신앙인 취급을 받습니다. 성도들이 함께 동참해서 어떤 일을 하고자 선동할 때, '그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라고 의견을 내는 사람은 교회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드는 반동분자취급을 받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 반동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라고 가르치는지 생각조차 해 보지 않고 일부터 시작하려 드는 사람일 겁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의 의미와 우상 숭배
하루묵상
844
2025/09/18
하루묵상_시91편 14절 "14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시편묵상 _시91편14절
시편묵상
827
2025/08/26
Topic. 열두 해 혈루증을 앓아 온 여인의 이야기에서 핵심은 무엇일까? 여인의 믿음일까?
열 두 해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의 이야기는 대부분 마지막 부분.. 즉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라는 부분에 주목하도록 합니다. 과연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면서 우리도 이 여인과 같은 믿음을 갖자는 것으로 결론내려야 하는 것일까요?
성경의 주인공은 항상 예수님이며, 또 예수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너무 위인적기식의 해석과 설교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설교의 주인공을 '예수님'에게서 '사람'으로 대치시켜 버립니다.
물론 '사람'을 강조하면서 본받아야 할 부분에 대한 설교가 전부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이 어떻게 부각되어 있는지를 잘 살펴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이 이야기를 예수님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질문합니다.
'왜 혈루증 여인이 손을 대었을 때 예수님은 부정해지지 않았는가?' 입니다.
'혈루증'이란 지속적으로 피가 나고 멈추지 않는 병입니다.
하혈이 언제나 일어나고, 그것도 시작하면 멈추지가 않으니 이 여인이 대단히 힘든 삶을 살았음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이 처해 있는 상황은 병으로 말미암은 육체적인 고통도 있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는 바는, 이 여인은 병의 고통보다 훨씬 더 큰 어려움 가운데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바로 "부정함"이라는 겁니다.
레위기 15장에 보면 '유출병'이 있는 자는 부정한 사람이 됩니다. 그와 접촉한 사람이라면 그도 부정한 사람이 될 뿐이었고, 사람들에게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늘 부정한 사람, 불결한 사람이라는 낙인을 가진 인생입니다. 혈루증은 그런 병입니다. 단지 육체적으로만 고통스러운 병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부정함을 입은 병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이 처해 있는 상황은 하나님께 기피거리가 되고, 사람에게 기피거라가 되는 부정과 불결의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주님께로 다가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댑니다. 상식적인 선에서, 율법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부정한 여인이 손을 댄 예수님은 부정하게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상식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부정해진 것이 아니라, 그녀가 깨끗해졌습니다.
사실 이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전 율법을 관통하는 거룩한 법칙은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이 접촉하면 항상 정한 것이 부정해진다' 였습니다. 그런데 그 법칙이 깨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구약에서 거룩의 법칙이 깨지는 경우는 단 한가지 경우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단만은 달랐습니다. 모든 부정한 것이 제단에 와서 접촉할 때는 단이 부정해진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접축한 제물이 거룩해졌습니다. 왜 일까요? 바로 '(어린 양의) 피' 때문입니다. 제단은 이것을 통해 접축하는 것을 거룩하게 하는 힘을 얻었습니다. 성전 안에서 사용되는 모든 기구들에는 어린 양의 피가 발라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 접축한 혈루증 여인이 왜 깨끗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 주님이 이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하는 어린 양의 보혈의 본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속죄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주님께 닿은 혈루증 여인은 주님을 부정하게 만들 수 없었습니다.
열두 해 혈루증을 앓아 온 여인의 이야기에서 핵은 무엇일까? 여인의 믿음일까?
하루묵상
826
2025/08/26
Topic. 에스더는 본받을만한 신앙의 여인인가?
에스더서를 읽으면서 우리는 주인공을 에스더와 모르드개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더구나 에스더에서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에스더... 통상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하나님을 위해 몸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던 멋진 여정이었을까요?
첫째, 에스더가 살고 있었던 당시 역사적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포로로 잡혀가 있는 상황으로, 에스더가 있는 곳은 바사(페르시아) 였습니다. 바사왕 고레스가 포로 귀환 칙서를 내린 후 한참 뒤에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여전히 바사 제국에 살고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포로 귀환을 선택하기 보다, 일신의 안락을 위해 그 땅에 그대로 머물기를 원했다는 그런 뜻입니다. 다시 본토로 돌아가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고생스럽게 모든 것을 시작하기보다 그냥 사회적으로 닦아 놓은 기반이 있는 그 땅에서 눌러 앉아 살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에스더와 모르드개 역시 그런 집안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둘째, 그들의 집안이 그렇다 하더라도 에스더와 모르드개 자신들의 신앙은 어떠했을까요?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왕후가 되려고 시도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다시는 이스라엘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로서의 정체성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일신의 영달을 위해 왕후와, 정권을 잡은 유력한 권세자가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과연 존경받을 만한 신앙의 투사로서의 자격이 있습니까?
게다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이방인과의 통혼을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왕후가 되려 하는 것은 이런 일에는 전혀 개의치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출신이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르드개는 에스더 더러, 그들이 어디 출신인지를 말하지 못하게 합니다.
에스더가 왕후가 되기 위해 궁에 들어갔을 때도, 에스더는 다니엘과 전혀 다르게 행동했습니다. 다니엘은 끌려간 귀족으로서 왕궁 안에서도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려 했지만, 에스더나 모르드개는 철저히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그들 속에 흡수되려 했습니다.
일례를 들자면,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행동은 창씨개명을 하고, 일본식 복제와 생활 양식을 흡수한 후, 일본 왕실 안에 들어가 그 나라의 국모가 되어, 철저한 일본인이 되려고 했던 친일파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기회주의적인 에스더나 모르드개의 모습이 우리에게 '모범'으로 적용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자꾸 성경을 인물중심으로 읽으려고 하니 성경을 단편으로 봅니다. 좋은 사람에게는 좋은 면만 뽑아내어 그것을 닮자고 설교를 하고, 나쁜 사람에게는 나쁜 면만을 뽑아내어 그렇게 살지 말자고 설교를 합니다.
하지만, 에스더나 모르드개는 비록 나중에 크게 쓰임받는 도구가 되기는 했지만, 절대로 본받을 만한 인물들이 아닙니다. 이것을 무시하고 단지 "죽으면 죽으리라"의 상황만을 보는 것은 매우 큰 문제가 됩니다.
그렇다면 에스더서는 어떻게 봐야할까요?
앞서 에스더의 주인공에 대해 언급했는데, 에스더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 주는 책입니까? 에스더서의 중요한 주제는 '부림'이라는 절기와 관려되어 있습니다. 부림절은 이스라엘 대적자 하만이 이스라엘을 멸절시키려 했을 때, 하나님이 이를 어떻게 구원하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은 출세를 위해 바사를 선택하고 이스라엘을 버린 자들을 도구로 삼아, 그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에스더는 본받을만한 신앙의 여인인가?
하루묵상
825
2025/08/22
Topic. 가계에 흐르는 저주.. 사실인가?
"5 ...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_출20:4~5
결론부터 말합니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와 같은 사고방식은 신앙적이라기보다는 주술적입니다. 사람이 갖고 있는 알지 못하는 두려움을 자극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좋지 못한 일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알지 못하는 나쁜 일을 만났을 때 사람들은 그 이유가 어디 있는지 혼란스러워합니다. 그때 이런 내용이 설득력을 갖습니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주술이지 성령이 아닙니다.
성경의 결론을 들었지만, 여전히 찜찜한 분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출애굽기 20장 5~6절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미워하는 자의 죄를 삼사 대까지 갚을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푼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언약적 특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언약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니 이 문장을 '문자적'으로 읽습니다.
'
언약적 특성
'은 계승되는 데 있습니다. 언약이란 하나님과 개인이 맺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공동체가 맺는 것으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과 언약하셨을 때는 그 언약이 전 세대에 걸쳐 미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조상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언약을 맺었다면 우리는 모두 그 언약 안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 중 누군가가 하나님을 떠나게 된다면, 성경의 방식으로는 우리가 그 조상의 허리에 있어서 함께 언약을 배반한 것이 되고, 우리 조상 중 누군가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면, 하나님은 그의 가문인 우리를 향해 기쁨과 복으로 대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언약을 범한 것으로 인해 노여워하시면서, '삼사 대까지 저주가 미칠 것'을 말씀하셨다고 해도, 그것은 삼사 대까지 기계적으로 미치는 저주가 아닙니다. 구약에서는
1000(천)이라는 숫자는 무한대
를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는데 무한하신 분이시며, 반대로 죄를 짓고 돌이키는 자에게는 용서하시는 분이시라는 그런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언약의 복과 저주를 선언하시고 시행하시는 것이 맞지만, 항상 그것은 대상자인 그 사람이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언약적 저주하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더 이상 저주는 그에게 효력적으로 작용하지 않습ㄴ디ㅏ. 언약적 복, 즉 부모와 조부모가 수대에 걸쳐 믿어 온 가정에서 자랐다고 할지라도 그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다면, 더 이상 복은 그에게 효력적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는 언약의 이러한 특성에 무지함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공포심만을 조장하는 무속적 저주가 되어 버렸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읽을 때, 언약의 복과 저주를 읽을 때, 언약의 당사자인 내가 어느 위치에 있늕를 분명하게 깨닫고, 그 위치에서 하나님 앞에 최대한 신실하게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계에 흐르는 저주.. 사실인가?
하루묵상
823
2025/08/19
하루묵상 _시90편 4절 “4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시편묵상_시90편4절
시편묵상
819
2025/08/09
하루묵상_시88편13절 "13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시편묵상_시88편13절
시편묵상
812
2025/07/29
하루묵상 _시84편10절 "10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시편묵상 _시84편10절
시편묵상
807
2025/07/23
Topic. 하나님은 첫째 날에 빛을 창조하셨는데, 왜 넷째 날에 태양을 또 만드셨을까?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1:3~5)
창조의 첫째날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넷째 날에도 하나님은 해와 달과 별과 같은 광명체들을 만드셔셔 낮과 밤을 나뉘게 하시고, 큰 광명체인 해는 낮을 주관하고 작은 광명체인 달은 밤을 주관하게 하셨습니다(창1:14~19).
질문이 생깁니다.
태양이 창조되기도 전에 어떻게 첫째 날부터 낮과 밤이 있었으며, 또한 태양이 없는데 어떻게 저녁과 아침이 되면서 하루가 지났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을까요? 성경의 기록이 맞다면 과연 첫째 날의 빛과 넷째 날의 빛은 어떻게 다를 것일까요?
이러한 의문과 궁금증은 태양이 유일한 빛의 근원이라는 과학적 지식에 의해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태양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빛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첫째 날의 빛과 넷째 날의 빛은(해,달,별)은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빛입니다.
하나님께서 첫째 날의 '빛'은 빛을 발하는 발광체가 아니라, 빛의 근원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피조 세계에 생명을 공급하는 에너지원을 가리킵니다. 이에 반해 넷째 날의 '광명에'는 '빛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므로 첫째 날 창조된 빛은 해와 달과 별과 같이 땅을 밝혀 주는 발광체가 아니라, 태초 전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벗어나게 한 빛의 근원 자체이며, 모든 우주 질서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이에 더해 성경에서 빛은 생명과 구원을 상징합니다. 사도 요한이 "하나님은 빛이시라"라고 선포한 것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자신을 가리켜 "나는 세상의 빛"이며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신 대로 빛과 생명은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빛으로 오신 주님을 통해서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첫째 날에 가장 먼저 창조하신 것이 빛이었다는 것은 생명이요 빛 되신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찬라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반면에 넷째 날에 창조된 해와 달과 별은 땅을 비추어 주는 발광체일 뿐입니다. 따라서 첫째 날에는 찬란한 빛의 근원으로 인해 빛과 어둠이 나누어지면서 낮과 밤의 구별만 있었지만, 이후에 넷째 날부터는 비로소 피조물인 광명체들이 땅을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후로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자전하게 하심으로써 이 땅에 오늘날과 같은 낮과 밤의 순환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첫째 날의 빛과 넷째 날의 빛은 그 특징과 창조의 목적이 전혀 다른 것으로서 완전히 구별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Topic. 하나님은 첫째 날에 빛을 창조하셨는데, 왜 넷째 날에 태양을 또 만드셨을까?
하루묵상
805
2025/07/22
Topic. 기도에 분량이 있을까? ②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인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마6:7)
어제에 이어 '기도에 분량이 있을까' 두번째 시간입니다. 기도에 채워야 할 분량이 있다거나, 혹은 더 많이 기도할수록 하나님이 들어주실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것의 두 번째 문제점은 없을까요?
두 번째 문제는 '행위주의 혹은 업적주의'의 문제입니다. 기도굑가 언제부터 가톨릭처음 인간이 업적을 많이 쌓으면 그것으로 인해 결과물을 얻는 종교가 되었습니까? 우리의 기도가 언제부터 백일 치성을 드리면 그 치성드린 정성이 쌓이고 쌓여서 기도가 응답이 된다는 개념을 갖게 됐습니까?
기독교의 기도는 인간이 얼마나 행위를 많이 쌓느냐에 따라 기도가 응답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개념은 이미 중세 로마교회에서 수없이 행해졌던 것이며, 이로 인해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개념이 매장되었고, 사람들이 '자신의 선행을 쌓아 그것으로 구원을 얻어 보려고 하는' 패악으로 치달았습니다.
기독교의 기도는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탑돌이를 하거나, 수행을 쌓거나, 공을 들이면 하나님이 들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문제 제기를 통해 '분량을 채워야 기도가 응답된다'는 식의 개념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
이제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6장 7절의 '중언부언하는 기도'에 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 중언부언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계십니까? 사실 '중언부언'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이곳에 단 한번밖에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먼저 중언부언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은 이렇습니다. 1)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거나, 2)아무 의미 없는 말을 계속적으로 중얼대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 보니,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기도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중언부언하는 기도의 개념이 여기에서 끝나는 것일까요?
주님은 "중언부언하지 말라"고만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을 덧붙이셨습니다.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7절).
왜 이렇게 부연설명을 이어하셨을까요?
주님은 중언부언의 기도가 단순히 의미 없는 주문을 되풀이하는 것 뿐만 아니라, 기도를 많이 해야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개념을 비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중언부언에는 '말을 많이 하는 것, 곧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는 개념이 들어 있어서입니다.
기도에 분량이 있을까? ②
하루묵상
801
2025/07/18
Topic. 기도에 분량이 있을까? ①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인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마6:7)
기도에 대해 알려진 통념들 중에 한 가지는 기도의 분량이라는 개념입니다. '기도의 분량을 채워야 한다,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이유는 기도의 분량이 다 차지 못했기 때문이다' 등등 이런 개념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일을 이루려고 할 때 크고 중요한 일일수록 더 많은 기도를 필요로 하고, 그래서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는 주장이 펼쳐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개념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과 같아지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기도가 응답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에 의한 것인가, 우리의 정성에 의한 것인가' 라는 문제입니다.
여기에 답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 봐야 할 게 있습니다. '기도란 뭔가'라는 개념정리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우선이기 때문에 뭔가 요구해서 그에 대해 응답을 받는다는 것은 결코 기도의 중심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기도의 작은 한 요소일 뿐이요,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감사와 회개, 즉 하나님과의 교제부분입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45주일 116문)은 기도가 무엇인지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문 : 그리스도인에게 왜 기도가 필요합니까?
답 :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감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또한 하나님은 그의 은혜와 성신을 오직 탄식하는 마음으로 쉬지 않고 구하고 그것에 대해 감사하는 사람에게만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기도를 감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통상적인 기도, 곧 '응답받는 기도'에 매달리는 우리의 처지에서 볼 때는 매우 낯선 개념입니다. 우리가 쉽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만 생각해 보아도, 아들이 아버지를 볼 때마다 뭐 해 달라, 뭐 달라, 달라, 달라고만 하는 부자 관계가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듯,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같은 것입니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교제라고 한다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 자체지, 뭔가를 끈질지게 구해서 받아 버리겠다고 하는 자세는 아닙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서, 첫 번째 문제 '그 기도가 응답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에 의한 것인가, 우리의 정성에 의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문제가 많이 잘못 설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할 때, '하늘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결국 기도란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방편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지만,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의 기도를 위해서 이루어져야 할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까, 우리의 뜻입니까?
따라서 기도를 할 때 뭔가 분량을 채워서 그것으로부터 응답을 끌어내겠다는 생각은 기도의 기초적 가치관을 흔드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사고는 결국 기도의 목적이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에 있습니다. 응답을 받겠다는 것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 보겠다는 것이요, 결국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가 반영된다기보다 자기가 중심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분량을 채우면 응답을 받게 된다는 사고방식은 애초에 하나님은 결여되어 있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에 대한 것은 없습니다. 내가 뭔가를 이루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그것은 안 하시기로 작정하셨다면 그것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기도에 분량이 있을까? ①
하루묵상
800
2025/07/17
오늘의 묵상 _시 83편 1절
"1 [아삽의 시 곧 노래]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
시편묵상 _시83편1절
시편묵상
796
2025/07/16
Topic.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와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는 같은 뜻일까?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결론부터 말하면 같은 뜻이 아니다.
창 1:1의 '태초'는 '처음' 또는 '시작'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출발점으로서 우주 만물이 존재하게 된 시작을 가리킨다. 또한 인류의 시작이 존재하게 된 시점으로서 인간들이 살아가는 역사의 시초를 의미하는 '태초'를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태초는 영원한 시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를 시작하신 그 시점을 뜻하는 것이며, 이는 곧 우주 만물과 인류 역사의 시작과 함께 그것의 끝이 되는 종말론적인 마지막이 있을 것임을 암시한다.
반면에 요 1:1의 '태초'는 '처음 또는 시작'의 의미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본문에서는 '영원부터'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만물이 창조되기 이전의 영원성을 가리킨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서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에서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으며(요1:14), 이 진리의 말씀은 태초에 하나님의 창조 사역 때에도 계셨고 태초 전에도 이미 계셨으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영원히 계실 분임을 의미한다. 이는 결국 창조 이전부터 영원히 계셨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창1:1의 '태초'가 이제 막 인류의 시간과 역사가 출발하는 창조의 시작점을 가리킨다면, 요1:1의 '태초'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에도 함께하셨고, 천지창조 그 이전에도 이미 계셨던 영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드러낸다.
따라서 창세기와 요한복음의 '태초'는 의미상으로는 서로 비슷한 뜻을 지녔다는 연관성은 있지만, 각각의 본문에서 의도하고자 하는 강조점은 서로가 전혀 다른 시점을 가리킨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와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는 같은 뜻일까?
하루묵상
797
2025/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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